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성 콤그룹 (문단 편집) == 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 == 박헌영이 당시 상황을 설명한 글을 보면 “(경성콤그룹이) 1941년부터 시작된 4~5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검거 결과 조직은 와해되었지만,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 계열의 3개 조직과 ‘TOC’(태평양노동조합) 계열의 3개 조직이 전쟁 기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 계열은 이관술, 이현상, 이주상 등의 대전 활동가들 외에 서울의 김태준, 박진홍, 서중석 등의 공산주의자협의회와 함경도의 [[리승엽]], 정재달 등의 자유와 독립 그룹이 있었다.[* 출처: 안재성, 박헌영 평전, 2020/ 정병준,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조선건국동맹]], 공산주의자협의회, 자유와독립그룹, 대전의 경성콤그룹 재건 세력 등은 연락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1944년 말부터 무장봉기계획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소련과 연안으로 조직원을 파견하였다. 조선건국동맹과 공산주의자협의회는 만주에서 조선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출처: 정병준,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아래 관련 자료에 있음)] 공산주의자협의회는 군사문제기구를 조직 내에 갖고 있었다. 공산주의자협의회는 소련으로 조직원 김일수를 파견하였다. 공산주의자협의회는 1944년 겨울 [[조선의용군]]의 국내 진입을 상의하기 위해 김태준과 박진홍을 옌안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출처: 정병준,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이처럼 이들은 다 연락하고 지냈는데 박헌영과만 연락이 안 됐다 하니 진짜로 박헌영은 1941년 이후에는 조직 재건 노력은 안 하고 숨어만 있었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d8d4d0 dashed; border-left: 5px solid #6667AB" 공산주의자협의회는 박헌영과 연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이현상과는 연락관계를 맺고 있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https://search.i815.or.kr/data2/ebook/history/056/index.html|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